일찍 깨달으면 삶과 세상이 불안해진다. (청년들이 도태되는 이유)

일찍 깨달으면 삶과 세상이 불안해진다. (청년들이 도태되는 이유)

 

깨달음을 얻는 건 도태되는 가장 위험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깨달음이 주는 건 나를 더 지혜롭게 만드는 방법인 것 같아도 우리는 아는 것이 많아지고 세상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동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힘든 일은 힘든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힘든 일이기에 우리는 도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 일을 직접 경험하기까지는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딨어라며 세상을 바라보고는 그 길에 도전하고는 했다.
 
만약 이 길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 두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도조차 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을 현저히 낮추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관계든 직업이든 잠깐의 순간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연예인으로 치면 친구따라 강남 가는 격이다. 그냥 친구 따라갔는데, 데뷔했어요.라는 식이다.
친구 따라 가서 무슨 득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혹은 내가 무슨 배우야? 내가 무슨 가수야 하며 자신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아무 시도도 안 한다면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는 이런 관점을 일찍 깨닫기 때문에 도태되는 영향을 자주 받고는 한다.
 
그러나 10년을 공들여도 인간관계는 불편한 사이가 대부분이다. 10년은 너무 길다. 1년을 공들여도 불편한 사이는 현실적으로 꾸준히 불편하다. 그러나 마음이 맞는 사람은 일주일만 만나도 인연이 될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다.
 
이런 현상은 보기 드물게 삶에서 흔히 발생하는데 내가 무언가를 함에 있어서 지레 겁을 먹거나 일찍 알고 깨달았다고 해서 이런 소중한 인연이라던지 그곳에 천직이 있을 것을 회피해버린다면 인생은 더욱 처참해지고 불행해지는 수순을 밟게 된다.
 
그만큼 우리는 작은 행동 하나가 인생을 바꾸는 것이지, 큰 것이 인생을 바꾼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이에 맞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데,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깨닫기에는 20대도 30대도 너무 어리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은 60넘어서 얻어도 족하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이견이자 도전으로 하여금 좋지 못한 결과를 얻는다고 하면 아니면 마는 걸로 퉁치면 된다. 그리고 다시 도전하면 된다

세생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공자가 나이를 은유해서 표현한 말인데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지학 志學은 15세 뜻하는 말로 이 시기에는 학문을 배우는 시기로 표현하고, 

약관(弱冠)과 방년(芳年)은  남녀를 20대로 표현하는 말인데, 꽃다운 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립(而立)은 30세를 뜻하는 말로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둔다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해석하면 공부를 했으니, 경험을 해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불혹(不惑)은 40세를 뜻하는데, 불혹이라는 말은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40대가 되면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그러니까 어느 정도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50이 되면 지천명이라는 이칭을 갖게 된다.
지천명(知天命)은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라고 하는데, 즉 삶을 깨닫는 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적어도 우리는 나이에 맞게 깨달아야 하는 부분이 있고, 이를 먼저 깨닫게 되면 인생이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흔히들 세상에 눈이 빨리 뜨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외면하면서 사는 경우가 흔히 볼 수 있어 외롭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아는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는 점을 먼저 말하고 싶다.
 
그래서 30대에 많은 경험을 통해 40대에 이치를 깨닫는 것처럼 우리는 그 순간부터 경거망동을 하지 않게 되며 급하지 않고 정제된 삶을 살아가고는 한다.
 
20대는 혈기왕성하여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생각하고 이행하는 경향이 있어,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는 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의 길이 맞는지 아닌지 세상에 묻고는 한다. 조언을 해줄 때는 정작 귀를 닫아버리고는, 자신의 길이 막히니까 세상에 묻고 세상이 답을 주지 않으니 그들의 탓을 운운한다.
 
그런데 이는 세상이 문제라기 보다는 자신이 너무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있기 때문에 도전이 두려운 것이고, 그것이 당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직접 몸소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을 맛봐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것은 생각보다 이로운 점도 있지만, 대부분 그 깨달음으로 도태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한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내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그 일에 비전과 방향이 어두운데
"도전을 할까요 말까요?" 묻는다.
 
내가 말한다.
"도전해봐."
 
그럼 내가 도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미 질문에서부터 그 일에 비전과 방향이 어둡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고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식을 갖고 있으니 그 기반으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도전할 가치가 떨어지면 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깨달음과 데이터를 얻는데,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수 없다.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꿈을 꾸어도 될까요?"
"아니, 꾸지 마. 그냥 살아."
 
그럼에도 꿈을 꾸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면, 지금 이 말을 듣지 않아서 후회하는 사람들은 억겁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물론 성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지 않길 잘했어.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들은 안다.
지옥으로 떨어졌는데도 지옥이 또 있네? 라며
그래서 "그냥 돈 벌면서 당신이 행복한 삶을 사세요. 꿈 말고." 라며 말한다.

이처럼 깨달음은 올바른 길을 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길을 주기도 한다. 적어도 자신의 인생인 만큼 다른 사람의 인생보다는 중요하고 값질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이주는 깨달음만으로 도전을 안 한다면 그 인생은 평생 빛을 보지 못할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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