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점을 알고 싶다면.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이 노력하지 않는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고되며,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해 우리는 흥미를 가진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처럼 세상을 낙관주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낙관주의는 생각보다 세상에 관심이 없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즐거움과 어느 정도의 적절한 보상이 따를 경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은 한 번 시도해서 한 번에 성공하기는 드물기 때문에 이런 성향과는 극히 대조적일 수밖에 없다.
정말 최선을 다하고, 보이지 않는 임계점을 위해 인간관계는 깨지고, 쌓아온 노력도 무너지며, 결국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살아왔는가 하는 의구심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우리는 꾸준히 허우적 거린다.
임계점.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절망에 빠지는 그 순간이 아니다.
무언가를 꾸준히 했을 때도, 임계점이라는 것이 안 올 수도 있다. 꾸준히라고 얘기를 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만큼의 위치까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어쩌면 진작에 임계점에 넘을 수도 있다고 본다.
공부를 하지 않았던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한다던가.
하지만 성적은 나오지 않는,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는 등의 상반되는 경우가 있다.
이렇듯 우리는 늘 본질과 멀어지기 때문에 임계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다.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다음에 내가 나의 적성을 준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일 중에서 그 일을 하기 위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보일 수도 있다.
나 역시도, 이미 오래전에 임계점을 넘어봤다.
숨이 턱턱 막히고, 아무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슬픔만이 가득했고, 죽 쒀서 개준 경우가 허다했더라고 해도
나는 배신을 당해도, 결코 타인에게 나쁜 마음을 갖지 않는다는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즉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오랫동안 쌓여온 노하우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배신을 당하거나 사기를 당하면, 나쁜 마음을 갖고, 선했던 과거의 마음을 등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여하튼, 임계점을 넘어보니 깨닫는 것이 있는데
바로 단 한 번의 성공이다. 인간은 무조건 안 되는 때만 있을 수는 없다.
언젠간 한 번 잘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누구라도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지고 그 기회를 잡는 순간이 있는데, 보통 그 순간의 기회가 나에게 정작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이제 그 순간을 저버리지 않을 자신이 생긴 것이다.
만약 사회에서 오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가정에서 오는 지옥의 순간과, 나 자신의 노력으로 일궈온 그 순간들이, 훗날 단 한 번의 성공을 거머쥔다면, 롱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구나. 좋은 리더가 될 수 있겠구나.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노력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좀 더 살아보니 생각지도 못한 행운은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소식은 아닐 경우가 많았다. 소설을 쓰는 내게 갑자기 드라마를 써보지 않겠냐는 등, 영화를 해보지 않겠냐는 등, 아니면 카피레이터로 일 해보지 않겠냐는 등 말이다. 하지만, 소설도 문외한인데, 이런 방면에서 내가 실력을 내보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신감도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이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두려움보단 당장 눈앞에 닥친 운을 타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르면서도 같은 분야에서 다시 만나게끔 되어있다는 사실까지.
안 돼도 어쩔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의 말이 맞을 수밖에 없지만.
난 1퍼센트의 가능성으로 실패를 쌓아가는 중이다.
쌓아가는 실패는 오롯이 값진 선물이 된다.
당시는 피를 토하는 슬픔과 좌절에 무릎을 꿇고 목놓아 우는 날도 많지만
그게 얼마만큼 앞서가고 있는 건지는 임계점이 넘어본 사람들만 안다.
결국에는 그들이 웃기 때문에 나도 조금 다른 인생을 살아보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결론은 그렇다.
생각보다 임계점은 내가 노력하고 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본질과의 거리가 더 가깝다는 것을.
그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내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큰 성공이 아니더라도, 내가 바뀌며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 확실하다.
그 나날이 쌓이면, 어느새 몰라보게 달라져 있을 거라는 사실까지도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해하기 쉽게 다시 설명하자면.
내가 과학자가 꿈이라면, 과학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할 수 있게 만드는 그 동기 말이다.
바로 꾸준히 엉덩이를 의자에 앉혀 공부하게 만드는.
생각보다 프로들도, 천재들도, 최고로 일하지 않는다.
한 가지의 날카로운 모서리(기본기)가 빛을 바랄 뿐이다.
손흥민 선수의 왼발 오른발 감아 차기처럼 말이다.
스프린트는 체력적인 문제라 근육과 나이라는 리스크가 주어지지만, 손흥민 선수의 감아 차기는 감각의 문제인 것처럼 나이가 들어도 몸은 잊지 못한다.
바로 그 감각으로 프로들은 일한다.
그러니 다 잘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한 가지의 임계점을 넘기기 위해 내가 노력하고 있다면, 어쩌면 이미 나는 임계점을 넘어서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놨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는 건, 당신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방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