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마주하는 일이 어쩌면 신이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시발점일 수 될 수 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자신과 마주할 일이 별로 없다. 이런 경우에는 특별히 큰 부를 이루거나 실패에 찌들어있는 상태일 수 있다. 아무 걱정이 없고 생각이 없다면 우리가 자신과 마주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가정을 이룬 가장이라면 아내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자식에게는 어떤 행복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등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행동이 행복을 불러 일으킬 것 같지만 상대적으로 걱정과 나를 마주할 일은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다.
문득, 만약 신의 기준에서 생각을 해보자면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왜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시발점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신은 과연 자신을 믿음으로써 내게 축복을 내릴까? 오히려 옆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서로를 위한 일이 진심이라면 그 둘에게 되려 축복을 내리지 않을까? 종교는 왜 필요한 거지? 등 말이다.
우리는 정말 많은 우여곡절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쓰러져 바닥을 기어가는 순간이 반드시 한 번은 오는 경험을 하고 신은 그런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신의 배려를 선물한다. 그런 우리는 망각을 통해 다시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행복해지려고 말이다. 더 윤택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말이다. 이 세상에 나온 이상 적어도 가족에게만큼은 발자취를 남기고 싶은 욕망 말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앞서 설명했듯 어쩌면 신이 자신을 마주할 기회를 주는 건,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막상 그 돈으로 인생이 망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바로 이 망각.
그래서 남자들은 아내에게 많은 돈을 가져다주고 싶고, 그 돈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나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막상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 기준점을 넘어가는 수입 이상은 별다른 감흥이 없다. 세간에는 그 돈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더 많은 욕심을 내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돈이라는 망각에 빠진다. 돈을 많이 벌어본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면 그 사람이 윤택해지는 이유는 바로 사회로부터 오는 인정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돈을 적게 벌어도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그러한 영향력을 끼친다면 그 사람의 삶이 꾀나 윤택해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다들 돈으로 행복을 산 사람들은, 결국 외로움에 허덕이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돈의 욕심이 많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을 때 보고 느낀 경우다. 남자들은 돈이 많아지면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합법이든 불법이든 여성을 쫓아다닌다. 나는 여성이 아니라서 여성의 마음은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바라본 여성의 삶도 그리 윤택해 보이진 않는다. 유독 여성에게만 골드미스와 같은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가 하는 건 성공한 여성들을 어떻게든 포장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냥 잘난 사람들은 그런 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자존감이 다수로부터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들인 여성들이 경거망동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돈으론 행복을 사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운동선수들을 예로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노력을 끝으로 자연스럽게 벌어들인 수익이 안락한 삶으로 이어졌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차 다른 방향으로 대화의 흐름이 이어졌다.
어쨌든, 나를 마주할 시간은 늘 비극 속에 있다. 악마의 속에 디테일이 있듯, 마냥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마주할 기회를 그냥 날려 보내서는 아니 된다.
기회의 순간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자기 객관화는 굉장히 중요하다. 별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성공을 위해선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과 낙관론적인 사고력을 키우는 게 인생에 분명 도움이 되는 부분이지만 꼭 그렇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자기 객관화 이것만이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기 객관화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나를 마주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속에는 비극이 깃들어있다는 것이다.
삶이 무너질 것만 같고, 두 다리가 주저앉아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요즘 들어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만 같고 SNS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해 가며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위치에서 결코 변화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변화는 힘이 드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는 어긋나는 행동을 뇌와 몸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조금의 노력으로 많은 가치창출과 변화가 보인다면 어느 정도 동기부여가 될 법도 하지만, 생각보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 또한 역설적이게도 사실이다.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
변화를 해야 한다는 것.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지.
지금 당장 삶으로도 괜찮은데?
바로 이 것이 문제다.
지금 당장 삶으로도 괜찮다는 점.
만약 이 생각이 머릿속에 깃들어있다면 당신은 최고의 순간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늘 인간이란 최고의 순간만 걸을 순 없다. 인생은 실패가 더 많이 오고 유혹은 끊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핀트가 나가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 나의 선택으로 오는 것도 아니다. 잘잘못은 타인에게서 올 수 있고,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에게서 올 수도 있다. 어느덧 자식이 사고를 쳐 생각지도 못한 스트레스에 두 머리를 감싸 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항상 어느 정도 대비를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마주하는 것.
나를 객관화하는 것.
실패의 근원을 뽑자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한다.
생각 외로 사람들은 자기 객관화가 힘들다. 주변에서 우쭈쭈 해주면 그 순간에 익숙해지고 나날이 거만과 오만이 따라붙게 된다. 인간의 망각은 신의 배려라고 생각하지만, 그 배려가 늘 인간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진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배려를 함으로써 늘 뒤통수를 맞지 않는가?
다 너를 위해서라며.
본인을 위해서나 좀 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