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행복해지려면 당장의 위기를 견뎌야 한다.
나는 서른 중반이 되면서 정말 많은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이 서른셋 전 후로 나뉘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점도 고생은 하되 더욱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바라는 마음이다. 많은 독서를 통해 얻어진 것들도 있으니 참고정도로만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을 좀 더 현명하게 처리해나갔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바람이 있다면 고생은 좀 해보는 게 좋다는 게 내가 살아오면서 뼈져리게 느끼는 이견이다.
바로 미래 행복해지려면 당장의 위기를 견뎌야 하는 이유 중 앞 서 거론했던 고생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치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얼마나 많은 경험이 자신의 지식을 깨워주는가 그게 아니라면 지혜를 깨워주는가로 인생은 결정된다고 본다.
우리는 무지라는 단어를 볼 때도, 무지는 지식이 없다는 것이 아닌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 일명 어리석다는 표현을 빗대어 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무지마저도 지식 기반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점도 누군가가 좀처럼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다. 지적했다가는 바로 꼰대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
간단하게 예를 들어볼까. 모두가 공감할 법한.
우리는 연애를 한다. 반복되는 이별을 겪고, 다시 사랑을 하지만 좀처럼 좋은 사람이 나타나기는 드물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이 만나봄으로써 이상형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과거가 늘 흠으로만 남는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첫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다)
전 여자친구가 다리를 떨었다면 다시는 다리 떠는 여자를 안 만나야지. 그럼 다리 떨지 않은 전 보다 조금은 더 나은 여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다름은 문신이 없는 여자를 만나야지 등 다음 연애는 더 나은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이처럼 경험치가 있어야 세상을 판단하고 좀 더 나은 여성을 고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경험치가 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연애를 하는 동안에는 정말 힘든 일이 많다. 왜냐하면 완전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것이니까. 안 맞을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더 많은 다수가 다른 삶을 살다가 함께 공존하게 된다. 그렇다면 얼마나 더 많은 제약이 따르겠는가.
그래서 버틴 놈이 성공한다는 말이 나온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버틴 놈들이 박힌 돌이라 대부분 문제지만 말이다.
사랑도 생각해 보면 행복만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연애를 하면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다. 싸우는 날이 잦고, 그로 인해 일희일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뿐만이겠는가 그 영향은 회사나 주변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경우는 그 순간들을 견디고 작은 행복들이 쌓여있기 때문에 미운 정이라고 말하는 행복과 사랑이 가슴 한편에 남아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다.
이별을 하면 그 작은 사랑조차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럽고 슬픔에 허덕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이겨내면 생각보다 더 좋은 인연이 들어오거나 더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별이 주는 고생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끈이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재밌다는 것이다. 막상 돌아보면 힘듦뿐인 삶인데도 우리는 작은 가치에 큰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큰 것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도 일정 순간이 넘어가면 행복을 찾기가 어려워 더 많은 욕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망상이니까. 그리고 그 망상을 믿는 게 우리고 결과는 파국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인생은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하지만, 계단식의 발전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생의 답보기간이 길어지는 경우가 이렇다. 우리가 발전하는 데는 꾸준히 발전한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잠깐이듯. 오히려 잠깐의 고통의 순간을 영원처럼 기억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나 같은 경우에도 20대 인생에서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4년을 노력해 온 꿈이 있었다. 훗날 노력이 부족해서인지, 재능이 부족해서인지 그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20대를 그거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포기하는 순간에 내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연애도 좀처럼 쉽지 않았고, 세상이 답보상태였다. 아니, 어쩌면 후퇴를 하고 있다는 게 맞았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나이는 계속 먹어갔으며 내가 세상에 발맞춰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20대의 도전만 가득했던 열정이 좀처럼 식어갔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지옥은 꾀나 길었다. 그렇지만 꿈을 잃은 순간만큼의 지옥은 아니었다. 사랑한 여성을 잃은 것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블로그를 하고, 영상 피디로 일을 하게 되었고,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광고 회사에서 광고를 내기도 했다. 엄청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나를 써줌으로써 밥 벌이는 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은 그 아픔들이 어디로 갔는지 앞으로의 나날들이 행복으로만 가득하고 희한하게도 죽기를 바랐던 내가 미래를 희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행복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의 교우관계였을까?
사회로 오는 인정이었을까?
그 무엇도 아니었다.
경험치다.
과거를 이겨냈다는 그 경험치.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 인생에 한두 번은 온다. 그 순간을 견뎌내느냐 마느냐에 다음 삶이 좀처럼 윤택해진다. 그 순간을 견뎌내지 못하면 결코 성장할 수 없고 더욱 도태될 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이 불행의 이면에는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견뎌내는 것이 지옥의 연속일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견디고 당장의 위기를 타파해내야만 한다. 나처럼 글을 써본다던가, 흥미 있는 일들을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내가 안 좋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동들을 해보는 것이 유일하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당장의 위기 속에 사는 자신이 그럴 판단은 좀처럼 서지 않는다는 것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다는 건 그저 견뎌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한 가지 긍정적인 걸 바라볼 수 있다면 이면에는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을 기대하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행복이 깃들 것이다. 이별이 영원히 기억되어도 상처는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