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무의미 할 때 보면 좋은 글.
요즘 MZ세대를 떠나 다양한 세대가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흔히들 주변만 보더라도 범죄가 끊이질 않는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좀 더 사회가 긍정적인 방향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누군가에게 원한을 갖거나 증오를 갖고 살아가지는 않을 테지만,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헤치는 것은 물론, 감옥에 가도 나의 삶에 대한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돈과 같은 물욕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마음은 급해지고, 뭘 먹고 살아야할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매번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보니 바뀌는 세상에 발맞추어 가는 것도 솔직히 일반인들에게는 버거운 게 사실이다. 고작 해봐야 하루 벌어먹고사는데 그친다.
하루의 에너지를 일하는 데 다 쏟아붓기 때문이다.
세상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이들을 비난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일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도 성공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구나 세상을 알아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같이 않기 때문에 내가 성공해서 이렇다 너는 그렇다 하는 건 오만이 부르는 편견이다. 그 이유는 지식과 부로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감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 무엇보다도 지식기반으로는 평가해선 아니 된다 생각하고, 그래서 인간에겐 유일하게 지혜가 뒤따른다.
바로 무지도 지식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모르는 것에 의의를 둔다.
계속해서 각박해지는 삶에 있어서 우리는 좀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하루가 정말 고단하다. 학생은 숨 쉴 틈도 없이 공부를 하고, 성인은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 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많고 물론 그 능력을 다 쓰며 살아가는 사람도 드문 것이 현실이지만 앞 서 말했듯 사람들이 깨닫는 시기는 모두가 다르고 대부분 관에 들어가기 직전에 깨닫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를 점점 먹어가고 죽음과 가까워질 때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스무 살이라서, 서른이라서, 마흔이라서 모두가 깨달음을 얻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불혹이든 지천명이든 애 같은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이 말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아는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일찍 세상을 알고
누군가는 일찍 재능을 가지고 성공을 한다.
공부 역시 재능이고, 꾸준한 노력 역시 재능이다.
그러지 못한 아이들과 어른들은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을 수도 있고
그런 습관이 인생이 되는 사람도 있다.
태어나보니 평생 갚지 못할 빚더미를 얹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불행의 연속과 그 불행이 유산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력하지만 죽기살기로 노력하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쩌면 죽기 직전에 꽃 한 번 피워볼 수 있을까란 촛불 한 점이 한낯 불어오는 콧바람에도 꺼질 수 있으니.
어느덧 30대 중순이 되면서 삶이 무의미함을 쫓아가봤다.
내 무의미함의 시작은 선이든 악이든 누군가를 도움으로서 가져온 불행이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멋모르는 상황에서 부른 무지가 선행이랍시고 나의 것을 계속 내어주니 아무것도 손에 남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무언가를 내줌으로써 진심은 타인에게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고 이로 인해 등을 돌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러지 않았으면 인생이 조금은 나아졌을까란 의문에서였다.
과정은 즐거웠다. 하늘이 준 재능을 깨닫는 순간이었으니까.
누군가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게 하늘이 내게 준 유일한 능력이었고, 물론 그 능력이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결과물이라고 할 지라도 이 능력이 훗날 한 번의 기회가 온다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게 할 요소라는 점은 분명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만 본다면 주변에 아무도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중에서야 그들로부터 들은 말은 그랬다.
“그 때 네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
그로서 내 능력이 증명이 되었다는 걸 나는 비로소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내 젊은 시절은 무기력과 이유 모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10, 20대로 돌아가라고 해도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길을 정말 많이 돌아갔지만 끊임없이 한 노력은 결국 30대의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가진 게 많지 않아도, 정작 사람이 옆에 없어도 나는 20대 전보다 확실히 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내 삶이 윤택해졌는지를 알고 있다.
이틀 전, 독서를 하면서 후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책에 나오는 저자들은 대부분 명문대생, 사짜 직업, 한 회사나 그룹의 사장 및 고위직, 이름 좀 날린 사람들의 이야기들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말은 전부 하나같이 옳은 말처럼 들리고 실제로도 그런 게 사실이다.
반면 그런 인생들을 내 인생에 막상 개입시켜보면 나와는 정말 다른 두뇌, 노력,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에 도달하지 못할뿐더러 하는 직업이나 가진 재능이 하나같이 다르다 보니 오히려 이입시킬수록 초라해지는 자신과 처절한 모습만이 남을 뿐이다.
반면 나같은 경우에는 뭐 하나 특별한 것이 없다.
유학을 갖다온 것도 아니고, 농고를 졸업해서 지잡대에 나와 명문대에 한 번 합격은 했으나, 결국 돈이 없어 자퇴를 했다.
뛰어난 재능이 없어 한 가지만 죽어라 4년을 팠음에도 그 분야에서 내 실력은 초등학생 글짓기만 못하다. 공부를 못했겠지, 여러 가지 변명이 뒤따를 수도 있지만 나도 성공한 사람들만큼의 재능은 없어도 의자에 앉아있는 노력은 서울대생 못지않게 최선을 다했다. 정말 오랜 시간을 앉아 공부했다. 매일 말이다.
그래서 삶이 더 무의미해지는 순간을 겪었던 것 같다.
숨이 꼴닥꼴딱 넘어가면서 공부를 했고, 남들 일하는 시간에 나는 계속해서 아껴가며 공부를 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를 돕던 순간과 미친 듯이 공부를 했던 순간들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순간은 바로 결괏값이다.
지금 내가 별 볼 일 없다는 것이 현실이고 이조차 누구에게 인정받지 못한 삶이라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런 현상을 겪고 있지 않나하는 많은 생각이 들었고, 사회가 병드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내가 무의미한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너무 뻔한 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운동을 꾸준히 해왔다. 이 이유는 내가 살면서 다 못해도 싫어하는 것 딱 하나쯤은 꾸준히 해보자. 그것이 바로 운동이었다.
이번에는 경험에서 오는 해결방법이다.
바로 마인드를 바꾸는 법인데,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조용한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계속 응시해봐라.
다음으로 내가 잃은 것을 생각하고, 괴로워하다 보면,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이라도 분명 얻어진 것이 있다.
내 입장에서 말하면, 공부를 하기 위해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공부라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나는 이 덕분에 앉아서 글 쓰는 것이 어렵지가 않게 됐다. (큰돈이 되지 않지만)
이게 왜 중요하냐면, 훗날 내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게 된다면 이 노력이 분명 빛을 바랄 거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얻어지는 경험치다.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도우면서 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회사의 오너가 될 경우 나는 사람을 다루는 것이 더 쉬워진다는 셈이다. 그들의 욕구를 보다 쉽게 충족시켜 줄 수 있고 그로서 회사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
바로 이것이 나를 계속 걷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옥에서도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삶은 계속 바닥만 걷지 않는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 날이 반드시 온다.
인생이란 반드시 한 번은 잘 된다. 그 한 번을 기다리며 나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나는 결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당장 생각해 보면 내가 얻은 것에 대해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히 더 깊게 생각해보면 얻은 것들이 반드시 떠오르게 되어있다.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경험치다.
그 경험치가 훗날 당신을 살게 만든다.
다시 오를 날에 날개를 달아줄 그 경험치를 생각하며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보기를 바란다